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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먼드 챈들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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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레이먼드 챈들러는 1888년 미국에서 태어나 영국에서 성장한 소설가이자 시나리오 작가이다. 1930년대 대공황 시기에 펄프 픽션 작가로 데뷔하여 하드보일드 탐정 소설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대표작으로는 《빅 슬립》, 《안녕, 나의 사랑》 등이 있으며, 사립 탐정 필립 말로를 주인공으로 한 작품들을 통해 '챈들러풍'이라는 문체를 창조했다. 또한, 영화 《이중 배상》, 《푸른 달리아》 등의 각본을 쓰며 할리우드에서도 활동했다. 1959년 사망했으며, 그의 작품은 한국을 포함한 여러 나라에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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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먼드 챈들러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검은 머리를 빗어 넘기고 파이프를 물고 있는 왼쪽을 보는 남자, 1943년경 레이먼드 챈들러
레이먼드 챈들러 (1943년경)
본명레이먼드 손턴 챈들러
출생1888년 7월 23일
출생지미국 일리노이주 시카고
사망1959년 3월 26일
사망지미국 캘리포니아주 샌디에이고
안장지마운트 호프 공동묘지, 샌디에이고, 미국
국적미국 (1888–1907, 1956–1959)
배우자시시 파스칼 (1924년 결혼, 1954년 사망)
직업소설가
시나리오 작가
작품 활동
활동 기간1933년–1959년
장르범죄 소설
서스펜스
하드보일드
영향대실 해밋
영향을 준 작가마이클 셰이본
로스 맥도널드
마크 노플러
로버트 B. 파커
마이클 코넬리
로버트 크레이스
무라카미 하루키
폴 오스터
코언 형제
쿠엔틴 타란티노
가즈오 이시구로
교육
모교덜위치 칼리지

2. 생애

1888년 미국 일리노이주 시카고에서 태어났으나, 아버지의 가출 후 어머니와 함께 1895년 영국으로 건너가 친척의 도움으로 성장했다.[65][43] 덜위치 칼리지에서 고전 교육을 받았고,[45] 이후 프랑스독일에서 잠시 생활하며 어학 실력을 키웠다. 1907년 영국 국적을 취득하고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여 영국 해군 본부에서 잠시 근무했으나[47] 적성에 맞지 않아 그만두었다. 이후 저널리스트와 시인으로 활동하며 문학계에 발을 들였지만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66]

1912년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 로스앤젤레스에 정착하기까지 여러 직업을 전전하며 어려운 시기를 보냈다.[66]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캐나다 군에 입대하여 프랑스 전선에서 복무했으며, 종전 무렵에는 영국 공군에서 훈련을 받았다.[44][49]

전쟁 후 로스앤젤레스에서 회계 관련 경력을 쌓아 1922년부터 석유 회사(Dabney Oil syndicate)에서 근무하며 부사장 자리까지 올랐다.[44] 이 시기, 군 복무 중 알게 된 동료의 계모이자 18세 연상인 시시 파스칼(Cissy Pascal)과 만나 어머니의 반대를 무릅쓰고 1924년 결혼했다.[44][50] 그러나 1932년에는 잦은 음주와 결근 등 불안정한 생활로 인해 석유 회사에서 해고되었다.[44]

2. 1. 초기 생애 (1888-1912)

1888년 미국 일리노이주 시카고에서 태어났다.[5] 아버지 모리스 벤자민 챈들러는 철도 회사에서 일하는 토목기사였으나 알코올 의존증이 있었고, 어머니 플로렌스 다트(토튼)는 아일랜드 출신이었다. 어린 시절은 네브래스카주 플래츠머스에서 외가 친척들과 함께 보냈다.[6] 1895년경 아버지가 가족을 버리고 떠나자,[7] 어머니는 아들에게 더 나은 교육 환경을 제공하기 위해 1900년 영국 런던 근교의 어퍼 노우드로 이주했다.[8][9] 아일랜드 워터포드에서 변호사로 성공한 외삼촌이 마지못해 그들을 지원했으며, 외할머니와 함께 살았다.[10]

블루 플래크는 챈들러가 아일랜드 워터포드에 머물렀던 Cathedral Square의 집을 표시하고 있다.


1900년 덜위치 칼리지(Dulwich College)에 입학하여 고전학 교육을 받았다. 이 학교는 작가 P. G. 우드하우스와 C. S. 포레스터를 배출한 곳이기도 하다. 챈들러는 여름 방학을 주로 워터포드의 외가에서 보냈으며,[11] 17세 무렵 학교를 그만두었다. 대학에 진학하는 대신 프랑스 파리독일 뮌헨에서 각각 6개월씩 머물며 외국어 실력을 쌓았다.

1907년, 작가를 지망했으나 외삼촌의 권유로 영국 국적을 취득하고 공무원 시험에 응시하여 우수한 성적(600명 중 3등)으로 합격했다. 이후 영국 해군 본부(Admiralty)에서 1년 남짓 근무하며 첫 시집을 출판했다.[47] 그러나 공무원 생활의 분위기를 견디지 못하고 가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사직했다.

이후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며 ''데일리 익스프레스''와 ''웨스트민스터 가제트'' 등에 글을 기고했다. 그는 주로 서평을 쓰거나 낭만주의 시를 창작했지만 큰 두각을 나타내지는 못했다. 당시 만난 시인 리처드 미들턴의 자살은 그에게 큰 충격을 주었으며, 작가로서의 길에 대해 회의를 느끼게 했다고 전해진다. 챈들러는 훗날 이 시기를 회상하며 “물론 지금과 마찬가지로 그 당시는 똑똑한 젊은이들이 수많은 문학 주간지를 통해서 프리랜서로 돈을 벌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분명히 똑똑한 젊은이가 아니었다. 행복하지도 않았다.”라고 말했다.[66]

1912년, 23세의 챈들러는 워터포드의 외삼촌에게서 500파운드를 빌려(이자와 함께 상환하는 조건) 안정된 직업을 찾기 위해 다시 미국으로 건너갔다. 잠시 샌프란시스코에 머물며 통신 교육으로 부기를 배웠고, 같은 해 말 어머니도 미국으로 합류했다.[49]

2. 2. 미국 정착과 결혼 (1912-1924)

1912년 챈들러는 아일랜드 워터포드의 삼촌에게서 500GBP를 빌려 안정적인 직업을 찾기 위해 미국으로 돌아왔다.[49] 처음에는 샌프란시스코에 정착하여 부기(회계)를 배웠고, 같은 해 말에는 어머니를 미국으로 불러들였다.[49] 1913년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하였으나,[49] 한동안 테니스 라켓 줄을 매거나 과수원에서 과일을 따는 등의 일을 하며 어려운 시기를 보냈다.[66][49] 이후 로스앤젤레스 유업(The Los Angeles Creamery)에 잠시 취직하기도 했다.[49]

1914년, 부양가족 수당을 받아 어머니에게 보내기 위해 캐나다 군(캐나디안 고든 하이랜더스)에 자원 입대했다.[44][49] 브리티시컬럼비아주 빅토리아에서 훈련을 받았으며, 1917년 미국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자 프랑스에서 복무하며 소대장이 되었다.[49] 1918년에는 당시 창설 초기였던 영국 공군(Royal Flying Corps)으로 배속되어 비행 훈련을 받던 중 종전을 맞았다.[44][49]

전쟁이 끝난 후 1919년 캐나다를 거쳐 어머니와 함께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로 돌아왔다.[44][49] 그는 살구 농장이나 스포츠 용품 회사에서 일하는 한편, 독학으로 부기를 다시 익혀 3년 과정을 6주 만에 마치기도 했다.[49] 이 시기, 군대 동료였던 고든 파스칼(Gordon Pascal)의 계모이자 18세 연상인 펄 유제니 "시시" 파스칼(Pearl Eugenie "Cissy" Pascal)과 만나 사랑에 빠졌다.[44] 시시는 1920년 남편과 이혼했지만,[44] 챈들러의 어머니는 이 관계를 강하게 반대했다.[44][50]

1922년부터는 대브니 석유회사(Dabney Oil Syndicate)에서 부기 담당 겸 감사역으로 일하기 시작했다.[44] 어머니의 반대로 시시와의 결혼은 4년간 미뤄졌으나, 1923년 9월 26일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44][50] 이듬해인 1924년 2월 6일, 챈들러는 시시와 결혼했다.[44][50]

2. 3. 석유 회사 근무와 해고 (1924-1932)

제1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캐나다를 거쳐 로스앤젤레스로 돌아온 챈들러는 1919년부터 살구 농장, 스포츠 용품 회사 등에서 일하며 독학으로 부기를 익혔다. 1922년부터는 Dabney Oil Syndicate라는 석유 회사에서 부기 담당 겸 감사역으로 고용되었다.

한편,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함께 입대했던 고든 파스칼의 계모이자 18세 연상인 시시 파스칼(Cissy Pascal)과 연애 관계를 맺었다. 챈들러의 어머니는 이 관계를 반대하여 결혼을 허락하지 않았으나, 1923년 어머니가 사망하자 이듬해인 1924년 2월 6일 시시와 결혼했다.[44][50]

석유 회사에서 능력을 인정받아 1931년에는 부사장으로 승진했으며, 한때 6개 석유 회사의 임원을 겸임하기도 했다. 그러나 잦은 음주, 상습적인 결근, 여성 직원과의 불륜[44] 등의 문제로 인해 1932년 결국 해고되었다.

3. 작가 활동

대공황 시기인 1932년, 44세에 석유 회사에서 해고된 후 생계를 위해 펄프 잡지에 추리 소설을 기고하기 시작했다. 첫 단편 소설 〈협박자는 쏘지 않는다〉(Blackmailers Don't Shoot)는 1933년 펄프 잡지 블랙 마스크에 실렸으며, 1939년에는 첫 장편 소설이자 탐정 필립 말로가 처음 등장하는 《빅 슬립》(The Big Sleep)을 출간했다. 이 소설의 성공으로 챈들러는 할리우드에서 시나리오 작가로도 활동하게 되었다.

이중 배상의 한 장면. 프레드 맥머리.


할리우드에서는 빌리 와일더 감독과 함께 제임스 M. 케인의 소설을 각색한 《이중 배상》(Double Indemnity, 1944)의 각본을 공동 집필했으며, 직접 쓴 오리지널 각본 《블루 달리아》(The Blue Dahlia, 1946)와 앨프리드 히치콕 감독의 《열차 안의 낯선 자들》(Strangers on a Train, 1951) 각색 작업에도 참여했다. 이 시기 챈들러 부부는 캘리포니아주 샌디에이고의 부유한 해안 도시인 라호이아로 이주했다.

챈들러는 대실 해미트, 제임스 M. 케인 등과 함께 하드보일드 탐정 소설 장르를 개척한 대표적인 작가로 평가받는다. 그의 문체는 빠른 전개와 함께 날카롭고 서정적인 직유 사용이 특징이며, 이는 "챈들러적"(Chandleresque)이라는 형용사를 낳기도 했다.[44] 그가 창조한 탐정 필립 말로는 샘 스페이드와 더불어 하드보일드 사립 탐정의 대명사로 여겨진다. 말로는 단순히 거친 인물이 아니라, 체스클래식 음악을 즐기고 때로는 감상적인 면모를 보이는 복잡한 인물로 그려졌다. 챈들러 자신은 영화에서 말로를 연기한 배우 중 캐리 그랜트가 가장 이미지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그의 장편 소설 중 특히 《빅 슬립》, 《안녕, 내 사랑》(Farewell, My Lovely, 1940), 《기나긴 이별》(The Long Goodbye, 1953)은 문학적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는 걸작으로 꼽힌다. 챈들러는 자신의 글쓰기 방식에 대해, 결말보다는 개별 장면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좋은 플롯은 좋은 장면들의 연속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59] 또한 펄프 잡지 작가로서 정해진 틀 안에서 작업해야 하는 고충을 토로하기도 했다.[59]

1954년, 아내 시시(Cissy)가 오랜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나자 챈들러는 깊은 슬픔에 빠져 알코올 의존증과 우울증이 심화되었다.[44] 1955년에는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으나, 사전에 경찰에 연락한 점 등으로 미루어 도움을 요청하는 행동이었을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아내 사후 여러 여성들과 교류하며 도움을 받기도 했지만, 외로움 속에서 집필 활동은 점차 줄어들었다.

1959년 3월 26일, 라호이아에서 폐 관련 질환 등으로 사망했다. 사망 직전 미국 추리 작가 클럽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그의 유산은 헬가 그린(Helga Greene)에게 상속되었으며, 샌디에이고의 묘지에 묻혔다. 챈들러는 아내 곁에 묻히길 원했지만 여러 사정으로 이루어지지 못하다가, 2010년 법원의 허가를 받아 2011년 밸런타인데이에 아내 시시의 유해가 그의 묘 옆으로 이장되어 합장되었다.[57][58]

챈들러의 작품은 W. H. 오든, 이언 플레밍 등 동시대 및 후대 작가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44], 작가 활동 당시에는 비판에 민감하게 반응하기도 했다. 오늘날 그의 문체는 여전히 높이 평가받지만, 플롯의 개연성 부족이나 특정 인물 집단에 대한 묘사가 비판받기도 한다.[61] 그럼에도 그의 소설은 1930년대와 1940년대 로스앤젤레스의 분위기를 생생하게 담아낸 것으로 인정받는다.[44]

3. 1. 펄프 픽션 작가 데뷔 (1933-1939)

대공황 시기인 1932년, 44세의 나이에 다니던 석유 회사에서 해고된 챈들러는 생계를 위해 자신의 글쓰기 재능을 살려 추리 소설을 쓰기로 결심했다.[17] 그는 펄프 잡지를 읽고 분석했으며, 특히 얼 스탠리 가드너의 작품을 모방하며 펄프 픽션 작법을 독학했다.[17][45]

그의 첫 전문 작품인 단편 소설 《협박자는 쏘지 않는다》(Blackmailers Don't Shoot)는 1933년 유명 펄프 잡지 블랙 마스크에 실렸다. 18,000단어 분량의 이 소설을 완성하는 데 5개월이 걸렸으며, 판매가는 180USD였다.[17] 장르 역사가 허버트 럼(Herbert Ruhm)에 따르면, 챈들러는 매우 신중하고 꼼꼼하게 작업하며 끊임없이 수정했지만, 얼 스탠리 가드너는 단 3~4일 만에 펄프 소설 한 편을 완성할 수 있었다고 한다.[17]

챈들러는 훗날 1950년에 영국 출판인 해미쉬 해밀턴에게 보낸 편지에서 펄프 잡지를 읽고 쓰게 된 계기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자동차를 타고 태평양 연안을 오가면서 펄프 잡지를 읽기 시작했는데, 던져버릴 만큼 싸고 여성 잡지라고 알려진 종류의 잡지에 대해서는 전혀 취향이 없었기 때문이다. 때는 ''Black Mask''의 전성기(그때가 전성기라고 부를 수 있다면)였고, 일부 글은 거친 면이 있었지만 상당히 강력하고 정직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나는 이것이 소설을 쓰는 법을 배우고 동시에 적은 돈이라도 벌 수 있는 좋은 방법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18,000단어짜리 단편 소설을 쓰는 데 5개월을 보냈고, 180달러에 팔았다. 그 후로 다시 뒤돌아보지 않았지만, 앞날을 생각하며 불안한 시기를 많이 겪었다."[51]

1939년에는 그의 첫 장편 소설이자, 이후 그의 작품 세계를 대표하게 될 탐정 필립 말로가 처음 등장하는 《빅 슬립》이 출간되었다. 이 소설은 챈들러가 하드보일드 탐정 소설 작가로서 본격적인 명성을 얻는 계기가 되었다.

3. 2. 필립 말로와 장편 소설 (1939-1958)

대공황 시기인 1932년, 44세의 나이에 석유 회사에서 일자리를 잃은 챈들러는 생계를 위해 글쓰기를 시작했다.[17] 그는 펄프 잡지를 탐독하고 얼 스탠리 가드너의 단편 소설을 모방하며 하드보일드 스타일을 독학했다. 그의 첫 소설인 〈협박자는 쏘지 않는다〉(Blackmailers Don't Shoot)는 5개월간의 집필과 수정을 거쳐 1933년 펄프 잡지 ''블랙 마스크''(Black Mask)에 180USD에 팔리며 실렸다.[17]

1939년, 그의 첫 장편 소설이자 탐정 필립 말로가 처음 등장하는 《빅 슬립》(The Big Sleep)이 출간되었다. 이 소설은 1인칭 시점으로 전개되며, 이후 챈들러 소설의 대표적인 특징이 되었다. 챈들러는 1950년 영국 출판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펄프 잡지를 읽고 글을 쓰게 된 계기를 "소설 쓰는 법을 배우고 동시에 적은 돈이라도 벌 수 있는 좋은 방법"이라고 설명했다.

두 번째 말로 소설 《안녕, 나의 사랑》(Farewell, My Lovely, 1940)은 큰 성공을 거두었고, 여러 차례 영화화되었다. 특히 1944년 딕 파월이 말로를 연기한 영화 《내 사랑을 죽여라》(Murder, My Sweet)는 챈들러 자신도 호평했다. 이러한 문학적 성공은 챈들러가 할리우드에서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하는 계기가 되었다.

챈들러는 빌리 와일더 감독과 함께 제임스 M. 케인의 동명 소설을 각색한 필름 누아르 영화 《이중 배상》(Double Indemnity, 1944)의 시나리오를 공동 집필했다. 와일더는 구조를 잡고 챈들러가 대사의 상당 부분을 썼다고 회고하며, 영화의 기억에 남는 대사 대부분이 챈들러의 공이라고 인정했다.[18] 이 시나리오는 아카데미상 각본상 후보에 올랐다.[18] 챈들러가 단독으로 집필한 유일한 오리지널 시나리오는 《푸른 달리아》(The Blue Dahlia, 1946)이다. 그는 마감 압박 속에서 술의 힘을 빌려 시나리오를 완성했다고 전해지며, 이 작품으로 다시 한번 아카데미 각본상 후보에 지명되었다.[19]

챈들러는 앨프리드 히치콕 감독의 영화 《열차 안의 이방인》(Strangers on a Train, 1951)의 시나리오 작업에도 참여했다. 패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원작 소설을 각색하는 과정에서 챈들러는 이야기의 설득력 부족을 지적했고, 히치콕과의 작업 방식 차이로 인해 갈등을 겪었다. 챈들러가 히치콕을 "저 뚱뚱한 망할 놈"이라고 불렀다는 말이 전해진 후 두 사람의 관계는 악화되었고, 결국 챈들러의 초고는 크게 수정되었지만, 그는 Czenzi Ormonde와 함께 최종 크레딧에 이름을 올렸다.[20]

1946년, 챈들러 부부는 캘리포니아주 샌디에이고의 부유한 해안 도시인 라 호야(La Jolla)로 이주했다. 이곳에서 그는 필립 말로 시리즈의 후기 걸작으로 평가받는 《기나긴 이별》(The Long Goodbye, 1953)과 그의 마지막 완결 장편 소설인 《플레이백》(Playback, 1958)을 집필했다. 《플레이백》은 이전에 유니버설 스튜디오를 위해 썼던 미완성 법정 드라마 시나리오를 기반으로 한 작품이다.

챈들러는 1957년경 마지막 필립 말로 단편인 〈연필〉(The Pencil)을 썼다. 그가 사망할 당시 미완성 상태로 남겨둔 소설 원고는 1989년 동료 작가이자 챈들러의 팬인 로버트 B. 파커에 의해 《푸들 스프링스》(Poodle Springs)라는 제목의 장편 소설로 완성되어 출간되었다. 파커는 챈들러와 공동 저자로 이름을 올렸다.

챈들러가 창조한 탐정 필립 말로는 대실 해미트의 샘 스페이드와 더불어 하드보일드 사립 탐정의 원형으로 꼽힌다. 영화에서는 험프리 보가트가 말로를 연기한 것으로 유명하지만, 챈들러 자신은 캐리 그랜트가 가장 말로 이미지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말로는 단순히 냉철하고 폭력적인 탐정이 아니라, 체스클래식 음악을 즐기고, 때로는 감상적인 면모를 보이며 자신만의 윤리적 기준에 따라 행동하는 복잡한 인물로 그려진다.

레이먼드 챈들러의 필립 말로 장편 소설 (1939-1958)
제목원제출간 연도
빅 슬립The Big Sleep1939
안녕, 나의 사랑Farewell, My Lovely1940
하이 윈도우The High Window1942
호수의 여인The Lady in the Lake1943
리틀 시스터The Little Sister1949
기나긴 이별The Long Goodbye1953
플레이백Playback1958


  • ''푸들 스프링스'' (''Poodle Springs'', 1989)는 챈들러의 미완성 유작을 로버트 B. 파커가 완성한 작품이다.

3. 3. 할리우드 활동 (1943-1951)



첫 장편소설 《거대한 잠》(The Big Sleep)이 1939년 출간되어 좋은 반응을 얻으면서, 레이먼드 챈들러는 할리우드로 활동 무대를 옮기게 되었다.

1944년, 그는 빌리 와일더 감독과 함께 제임스 M. 케인의 소설 《이중 배상》(Double Indemnity영어)을 각색하여 동명의 영화 각본을 공동으로 집필했다. 이 영화는 필름 누아르 장르의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1946년에는 챈들러가 직접 쓴 오리지널 각본인 《블루 달리아》(The Blue Dahlia)가 영화로 만들어졌다. 또한 1951년에는 앨프리드 히치콕 감독의 영화 《열차 안의 낯선 자들》(Strangers on a Train)의 각본 작업에 참여했다. 이 영화는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이 시기 챈들러 부부는 캘리포니아주 샌디에이고 카운티의 부유한 해안 도시인 라호이아로 이주하였다.

챈들러는 할리우드에서 일하며 영화와 소설의 차이에 대해 고민했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매우 현명한 프로듀서"가 추리 소설을 영화화하기 어렵다고 말했던 경험을 언급했다. 그 이유는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반전이나 폭로 장면이 영화에서는 단 몇 초 만에 지나가 버리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챈들러는 이것이 결말에만 집중하는 전통적인 미스터리 소설의 한계 때문이라고 보았으며, 장면 중심의 서사를 강조하는 "블랙 마스크" 스타일이 영화에 더 적합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59]

챈들러가 각본 작업에 참여한 주요 영화와 미완성 프로젝트는 다음과 같다.

연도제목원작자감독주연비고
1944년이중 배상
(Double Indemnity영어)
제임스 M. 케인빌리 와일더프레드 맥머리, 바버라 스탠윅빌리 와일더와 공동 각본
1944년사랑의 새벽
(And Now Tomorrow영어)
레이첼 필드어빙 피첼앨런 래드, 로레타 영프랭크 파르토스와 공동 각본
1945년디 언신
(The Unseen영어)
에설 리나 화이트루이스 앨런조엘 매크리, 게일 러셀헤이거 와일드와 공동 각본. 일본 극장 미개봉.
1946년블루 달리아
(The Blue Dahlia영어)
(오리지널 각본)조지 마셜앨런 래드, 베로니카 레이크챈들러 오리지널 각본
1951년열차 안의 낯선 자들
(Strangers on a Train영어)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앨프리드 히치콕팔리 그레인저, 로버트 워커체인치 올몬드와 공동 각본



'''영화 미제작 각본'''


  • The Innocent Mrs. Duff영어 (파라마운트 픽처스, 1946년) - 원작: 엘리자베스 샌세이 홀딩
  • Playback영어 (유니버설 스튜디오, 1948년) - 오리지널 각본. 이후 소설 《플레이백》의 원형이 됨.


챈들러의 각본과 그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들은 필름 누아르 장르의 스타일과 주제 형성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4. 후반 생애와 죽음 (1954-1959)

아내 시시 챈들러가 오랜 지병을 앓는 중에도 챈들러는 《기나긴 이별》을 완성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54년 시시가 사망하자, 그는 깊은 좌절감과 외로움에 빠져 다시 술에 의존하기 시작했고, 이는 그의 남은 생애 동안 계속되었다. 이 때문에 그의 글의 질과 양 모두 나빠졌다. 시시가 사망했을 때, 챈들러는 그녀의 화장된 유해를 안치하는 절차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고, 유해는 57년 동안 사이프러스 뷰 묘지 지하 보관함에 방치되었다.

1955년에는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오랜 포옹, 레이먼드 챈들러와 그가 사랑한 여인들》(The Long Embrace: Raymond Chandler and the Woman He Loved)의 저자 주디스 프리먼(Judith Freeman)은 챈들러가 자살 시도 전 경찰에 미리 연락하여 계획을 알렸다는 점을 들어, 이를 일종의 '도움을 요청하는 외침'으로 해석했다. 시시 사후 챈들러의 외로움은 그의 주요 우울 장애 경향을 악화시켰다. 이 시기 그의 공적, 사적인 삶은 여러 여성들과의 관계로 인해 도움을 받기도 했지만 동시에 복잡해졌다. 여기에는 그의 문학 에이전트였던 헬가 그린(Helga Greene), 비서였던 진 프랑카세(Jean Fracasse), 조지 오웰의 미망인 소니아 오웰(Sonia Orwell), 그리고 스티븐 스펜더의 부인 나타샤 스펜더(Natasha Spender) 등이 포함된다. 소니아 오웰과 나타샤 스펜더는 그를 동성애자로 생각했다고 전해진다.[67]

1956년 챈들러는 영국의 권리를 유지하면서 미국 시민권을 다시 취득했다. 영국에서 잠시 머물다 라호야로 돌아온 후, 그는 1959년 스크립스 메모리얼 병원(Scripps Memorial Hospital)에서 폐렴성 말초 혈관 쇼크(pneumonial peripheral vascular shock)와 신전성 요독증(pre-renal uremia)으로 향년 70세에 사망했다. 사망 당시 그는 "『빅 슬립』과 다른 추리 소설"의 작가로 기억되었다.[23]

그의 사후, 유산을 둘러싸고 헬가 그린과 진 프랑카세 사이에 법적 다툼이 벌어졌다. 1960년, 프랑카세가 챈들러의 자필 유언장 유언 보충서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으나, 법원은 헬가 그린의 손을 들어주어 그녀가 챈들러의 6만달러 상당의 유산을 상속받게 되었다.

챈들러는 캘리포니아주 샌디에이고에 위치한 마운트 호프 묘지에 묻혔다. 그의 전기 작가 프랭크 맥셰인(Frank MacShane)에 따르면, 챈들러는 화장되어 사이프러스 뷰 묘지에 있는 아내 시시 곁에 묻히기를 원했으나,[24] 장례나 매장에 대한 명확한 지침을 남기지 않아 마운트 호프 묘지에 안장되었다. 진 프랑카세와 그녀의 자녀들이 세운 챈들러의 원래 묘비는 여전히 그의 무덤 머리맡에 남아 있다.

레이먼드와 시시 챈들러의 묘비


2010년, 챈들러 연구가 로렌 랫커(Loren Latker)는 변호사 아이사 웨인(존 웨인의 딸)의 도움을 받아 시시의 유해를 발굴하여 챈들러와 함께 마운트 호프 묘지에 합장하는 청원을 제기했다. 2010년 9월 캘리포니아 고등 법원 심리 후, 리처드 S. 휘트니 판사는 랫커의 요청을 승인했다.[25] 2011년 2월 14일, 시시의 유해는 사이프러스 뷰에서 마운트 호프로 옮겨져 챈들러의 유해 위에 안치되었고, 새로운 공동 묘비가 세워졌다.[26] 이 행사에는 약 100명이 참석했으며, 공동 묘비에는 《빅 슬립》의 구절인 "죽은 사람은 부러진 마음보다 더 무겁다(Dead men are heavier than broken hearts)"가 새겨졌다.

5. 작품 세계

W. H. 오든, 에블린 워, 이언 플레밍을 포함한 여러 비평가와 작가들은 챈들러의 문체를 높이 평가했다. 플레밍은 챈들러의 대사가 "오늘날 쓰여진 어떤 산문보다 훌륭하다"고 말했으며,[27] 현대 미스터리 작가 폴 레빈은 그의 스타일을 "문학적으로는 배를 한 방 먹이는 것과 같다"고 묘사했다.[28] 챈들러의 빠르고 하드보일드 스타일은 주로 대실 해밋에게서 영향을 받았지만, "루거 권총의 총구는 제2번가 터널의 입처럼 보였다"와 같은 날카롭고 서정적인 직유는 독창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의 글쓰기는 사립 탐정 소설 장르를 재정의했고, '챈들러풍(eng)'이라는 형용사를 만들어냈으며, 패러디와 모방의 대상이 되었다.

그의 대표적인 주인공 필립 말로는 대학 교육을 받고 체스와 클래식 음악을 즐기며, 비윤리적인 의뢰를 거절하는 등 자신만의 원칙을 지키는 복잡하고 때로는 감상적인 인물로, 전형적인 터프가이와는 거리가 멀다.

오늘날 챈들러가 받는 높은 평가와는 달리, 그는 생전에 비판적인 평가에 어려움을 겪었다. 1942년 블랑쉬 크노프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내가 터프하고 빠르고 난장판과 살인으로 가득한 무언가를 쓸 때, 그렇게 비난을 받고, 약간 톤을 낮추고 상황의 정신적, 감정적 측면을 발전시키려고 할 때, 처음 넣으라고 비난받았던 것을 빼먹었다고 비난을 받는다"며 엇갈린 비판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다.

그의 작품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워싱턴 포스트''의 평론가 패트릭 앤더슨은 그의 줄거리가 "기껏해야 두서없고, 최악의 경우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지적했으며(챈들러 스스로도 ''빅 슬립''에서 운전기사를 누가 살해했는지 몰랐다는 일화가 있다[29]), 흑인, 여성, 동성애자 캐릭터 묘사에 대해 비판하며 그를 "때로는 다소 불쾌한 사람"이라고 평가했다.[30][31] 그럼에도 앤더슨은 챈들러를 "아마도 주요 범죄 작가 중 가장 서정적인 작가"라고 칭찬하며 그의 문학적 성취를 인정했다.[32]

챈들러의 소설들은 1930년대와 1940년대 로스앤젤레스와 그 주변의 시대상과 분위기를 생생하게 포착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작품 속 배경은 실제 장소를 바탕으로 하지만, 베이 시티(산타 모니카), 그레이 레이크(실버 레이크) 등 가명을 사용했다.

『플레이백』을 제외한 그의 모든 장편 소설은 영화로 만들어졌다. 특히 하워드 혹스 감독, 험프리 보가트 주연의 ''빅 슬립''(1946)은 윌리엄 포크너와 리 브래킷이 각본에 참여하여 유명하다. 챈들러의 각본 작업과 그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들은 미국 필름 느와르 장르의 스타일과 주제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로버트 올트먼 감독의 1973년작 ''롱 굿바이''는 말로 캐릭터를 새롭게 해석한 네오 느와르 각색으로 주목받았다.

여러 작가와 비평가들이 챈들러의 작품 세계를 높이 평가했다. 로스 맥도널드는 그가 "슬럼가의 천사처럼 글을 썼고, 로스앤젤레스의 풍경을 낭만적인 존재로 변모시켰다"고 평했으며,[62] 폴 오스터는 "챈들러가 미국에 대해 이야기하는 새로운 방법을 발명했다"고 말했다.[62] 조이스 캐롤 오츠는 그의 산문을 "자연스러운 웅변의 극치"라 칭하며 독자들이 그의 글에 매료된다고 했고,[62] 조나단 레섬은 그의 소설이 "미국 과거에 대한 완벽한 스냅샷"이라고 평가했다.[62] 피코 아이어는 챈들러가 "전후의 꿈을 발명"했으며 "우리 시대의 고전적이고 외로운 낭만적인 아웃사이더"라고 칭했다.[62]

5. 1. 하드보일드 탐정 소설

1932년, 44세의 나이에 대공황 여파로 석유 회사에서 해고된 후 추리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첫 단편 「협박자는 쏘지 않는다(Blackmailers Don't Shoot)」는 1933년 유명 펄프 잡지인 블랙 마스크에 실렸다. 첫 장편 소설은 1939년에 발표한 『빅 슬립』이다. 그는 총 7편의 장편 소설을 남겼으며(여덟 번째 작품은 사후 로버트 B. 파커가 완성했다), 나머지는 중편과 단편이다. 그의 장편 소설 대부분은 이전에 썼던 중편 소설을 바탕으로 확장한 것이다. 『플레이백』을 제외한 모든 장편 소설은 영화로 만들어졌다. 사망 직전에는 미국 추리 작가 클럽 회장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1959년 3월 26일, 캘리포니아주 라호야에서 사망했다.

챈들러는 대실 해미트, 제임스 M. 케인 등 다른 블랙 마스크 출신 작가들과 함께 하드보일드 탐정 소설 장르를 개척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의 문체는 미국 대중 문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가 창조한 주인공 필립 말로는 해미트의 샘 스페이드와 더불어 하드보일드 사립 탐정의 대명사로 꼽힌다. 영화에서는 험프리 보가트가 두 캐릭터를 모두 연기했지만, 챈들러 자신은 캐리 그랜트가 필립 말로 이미지에 가장 가깝다고 생각했다.

챈들러의 장편 소설 일부는 문학 작품으로서 중요하게 여겨지며, 특히 『빅 슬립』(1939), 『안녕, 내 사랑』(1940), 『기나긴 이별』(1953)의 3 작품은 걸작으로 평가받는 경우가 많다. 한 미국 범죄 소설 앤솔로지에서는 『기나긴 이별』에 대해 "주류 문학 속에 미스터리 요소를 도입한 작품. 단, 그 1번은 20년 이상 전에 출판된 해미트의 『유리의 열쇠』이다"라고 평했다.

1950년 단편집 《내 사업은 문제》(My Business is Trouble) 서문에서 레이먼드 챈들러는 탐정 소설의 공식과 펄프 잡지가 이전의 탐정 소설과 어떻게 달랐는지에 대한 통찰력을 제공했다.

> 표준 탐정 소설의 정서적 기반은 살인은 밝혀지고 정의가 실현된다는 것이었고, 항상 그래왔다. 그것의 기술적 기반은 마지막 결말을 제외한 모든 것의 상대적인 중요성이었다. 그 일로 이어지는 것은 거의 통과 작업이었다. 그 결말은 모든 것을 정당화할 것이다. 반면에, 《블랙 마스크》 타입의 소설의 기술적 기반은 좋은 줄거리가 좋은 장면을 만드는 것이라는 의미에서 장면이 줄거리보다 중요했다. 이상적인 미스터리는 결말이 없어도 읽을 만한 것이었다. 우리, 즉 그것을 쓰려고 했던 사람들은 영화 제작자들과 같은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처음 할리우드에 갔을 때, 매우 지적인 프로듀서가 미스터리 소설로는 성공적인 영화를 만들 수 없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그 핵심은 관객이 모자를 집으려 할 때 몇 초 동안 화면에 나타나는 폭로였기 때문이다. 그는 틀렸다. 하지만 단지 그는 잘못된 종류의 미스터리를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챈들러는 또한 펄프 잡지 작가들이 펄프 잡지 편집자들이 요구하는 공식을 따르는 데 겪었던 어려움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 내 소설들을 되돌아보면, 그들이 더 낫기를 바라지 않는다면 터무니없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훨씬 더 훌륭했다면 출판되지 않았을 것이다. 공식이 조금 덜 엄격했다면, 그 시대의 더 많은 글들이 살아남았을지도 모른다. 우리 중 일부는 공식을 벗어나려고 꽤 열심히 노력했지만, 우리는 보통 잡혀서 다시 돌아가곤 했다. 공식을 파괴하지 않고 공식을 초과하는 것은 희망 없는 해커가 아닌 모든 잡지 작가의 꿈이다.[59]

W. H. 오든, 이블린 워, 이언 플레밍과 같은 평론가와 작가들은 챈들러의 산문을 높이 평가했다.[44]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챈들러와 대담한 플레밍은 챈들러의 대화체를 칭찬했다.[60] 빠른 전개와 하드보일드 스타일은 대실 해밋에게서 영감을 받았지만, 그의 날카로운 서정적인 직유는 독창적이다. 챈들러의 작품은 탐정 소설이라는 장르를 재정의했고, "Chandleresque"(챈들러적)라는 형용사가 생겨났으며, 필연적으로 패러디나 파스티쉬의 대상이 되었다. 탐정 필립 말로는 스테레오 타입의 터프 가이가 아니라 복잡하고 때로는 감상적이기도 하며, 친구는 적고, 스페인어를 약간 할 줄 알며, 때때로 멕시코인을 칭찬하며, 체스와 클래식 음악을 좋아한다. 또한,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면 의뢰인의 돈을 받지 않는다.

오늘날 챈들러의 명성과는 대조적으로, 작가로 활동하던 당시에는 평론에 상처를 입었다. ''레이먼드 챈들러의 선집 서한''(Selected Letters of Raymond Chandler)에 수록된 1942년 3월 블랑쉬 크노프에게 보낸 편지에서, 작품 스타일을 바꾸려고 하면 비판받는 것에 불만을 토로했다.

최근에도 그의 작품에 대한 비판적인 평론이 존재한다. 워싱턴 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서평가 패트릭 앤더슨은 줄거리가 "좋게 말하면 산만하고, 나쁘게 말하면 일관성이 없다"고 지적하고, 흑인, 여성, 동성애자 등장인물의 취급이 형편없다고 비판했다. 그럼에도 앤더슨은 챈들러를 "아마 주요 범죄 소설 작가 중 가장 서정적"이라고 칭찬했다.[61]

챈들러의 소설은 1930년대부터 40년대까지의 로스앤젤레스와 그 근교의 분위기를 잘 전달하고 있다.[44] 다만 지명은 변경되어 있다. 베이 시티는 샌타모니카, 그레이 레이크는 실버 레이크, 아이돌 밸리는 샌퍼낸도 밸리에 각각 해당한다.

챈들러는 펄프 소설의 비평가이기도 했다. 에세이 "간단한 살인법"이 특히 유명하다.

장편 소설은 『플레이백』을 제외하고 영화화되었다. 가장 유명한 작품은 하워드 혹스 감독, 험프리 보가트 주연의 『빅 슬립』(1946)이다. 윌리엄 포크너가 각본에 참여했다. 챈들러의 각본과 영화화된 소설은 필름 누아르라는 장르의 스타일과 주제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 E.S. 가드너와 친교가 있었다. 챈들러는 1939년 5월 5일 가드너에게 보낸 편지에 "우리가 옛날 '액션 디텍티브' 잡지에 대해 이야기했을 때, 에드 젠킨스의 대역과 같은 인물로, 할리우드 언덕에 저택을 짓고 협박에 대항하는 조직을 만들었던 젊은 여자와 관계를 맺는 렉스 케인이라는 남자에 대해 쓴 당신의 작품에서, 제가 단편 쓰는 법을 배웠다는 것을 당신에게 말하는 것을 잊었습니다. (중략) 저는 당신의 소설에 대한 매우 상세한 개요를 만들고, 그것을 다시 쓰고, 완성된 것을 당신의 것과 비교하고, 다시 돌아서서, 더 다시 쓰는 것을 반복했습니다."라고 썼으며[45], 가드너의 작품을 모범으로 삼았던 것으로 보인다.

  • 다음은 챈들러의 작가 평론으로, 1949년 4월 16일 알렉스 바리스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이다.

# 엘리자베스 홀딩은 작품은 많지 않지만 꾸준히 글을 쓰는 개성적인 서스펜스 작가 중 최고이다.

# F.W. 크로프츠는 세밀한 묘사 부분에서 최고이다.

# 도로시 L. 세이어스는 라틴어와 그리스어 인용 부분에서 최고이다.

# 필립 맥도날드는 접근하기 쉬운 매력 부분에서 최고이다.

# 겁을 주는 작가 중 최고는 없지만, 굳이 꼽자면 도로시 B. 휴즈이다.

# 마가렛 밀러의 『눈의 벽』에 등장하는 MC가 가장 흥미로운 인물이다.

  • 챈들러는 해미시 해밀턴(챈들러의 저작을 출판했던 런던 서점의 전무)에게 보낸 편지(1949년 12월 4일)에서 다음과 같이 썼으며, 서머셋 몸의 ''”Ashenden”'' (1928), ''”A Christmas Holiday”'' (1939), 프로스페르 메리메의 『카르멘』(1845),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Trois Contes”'' (『세 개의 단편』, 1877)에 수록된 ''”Hérodias”'', ''”Un cœur simple”'' 및 ''”마담 보바리”'' (1857), D.H. 로렌스의 ''”The Captain’s Doll”'' (1923), 헨리 제임스의 ''”The Spoils of Poynton”'' (1896), ''”The Wings of a Dove”'' (1902, 1909)를 높이 평가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챈들러는 슬럼가의 천사처럼 글을 썼고, 블라인드 너머의 로스앤젤레스의 풍경을 낭만적인 존재로 변모시켰다.

> -- 로스 맥도널드[62]

> 레이먼드 챈들러는 미국에 대해 이야기하는 새로운 방법을 발명했고, 그 이후 우리에게 미국은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비치게 되었다.

> -- 폴 오스터[62]

> 그 산문은 자연스러운 웅변의 극치에 있으며, 우리는 단순한 이야기꾼이 아닌 명문가, 비전을 가진 작가의 존재에 주목하고 흥분을 느낀다… 독자는 챈들러의 유혹적인 산문에 매료된다.

> -- 조이스 캐롤 오츠, ''New York Review of Books''[62]

> 챈들러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 중 한 명이다. 그의 책은 몇 년마다 다시 읽을 가치가 있다. 그 소설은 미국의 과거에 대한 완벽한 스냅샷이며, 지금은 사라진 낭만주의의 표현은 어제 쓰인 것처럼 신선하다.

> -- 조나단 레섬[62]

> 챈들러는 전후의 꿈을 발명한 것 같다. 강인하고 다정한 영웅, 위험한 금발 미녀, 빗물에 씻긴 보도, 멀리서 들려오는 교통(과 바다)의 울림… 챈들러는 우리 시대의 고전적이고 외로운 낭만적인 아웃사이더이며, 그가 없었다면 미국 문학이나 영문학은 더 가난해졌을 것이다.

> -- 피코 아이어[62]

5. 2. 필립 말로

필립 말로는 레이먼드 챈들러가 창조한 주인공으로, 대실 해미트의 샘 스페이드와 함께 하드보일드 계열 사립 탐정의 대명사로 여겨진다. 영화에서는 험프리 보가트가 말로와 스페이드 역할을 모두 연기했지만, 챈들러 자신은 캐리 그랜트가 말로의 이미지에 가장 가깝다고 생각했다.

말로 탐정은 전형적인 터프가이와는 거리가 멀다. 그는 복잡하고 때로는 감상적인 면모를 지녔으며, 친구가 적다. 스페인어를 약간 구사할 줄 알며, 때때로 멕시코인에 대해 긍정적인 묘사를 하기도 한다. 또한, 체스클래식 음악을 즐기는 취미를 가지고 있다. 자신의 윤리관에 어긋난다고 판단하면 의뢰인이 제시하는 보수를 거절하는 등 독자적인 원칙을 지키는 인물로 그려진다.[44]

5. 3. 사회 비판

챈들러의 작품은 1930년대와 1940년대 로스앤젤레스와 그 주변 지역의 시대상과 분위기를 생생하게 담아내며 사회 비판적인 시각을 드러낸다.[44] 그의 소설 속 배경은 실제 장소를 바탕으로 하지만, 베이 시티(산타 모니카), 그레이 레이크(실버 레이크), 아이들 밸리(샌 페르난도 밸리의 부유한 커뮤니티)처럼 가명으로 처리되었다.

그의 대표적인 탐정 캐릭터 필립 말로는 전형적인 하드보일드 탐정과는 거리가 있다. 그는 대학 교육을 받았고, 체스와 클래식 음악을 즐기며, 때로는 스페인어를 사용하고 멕시코인이나 흑인에게 존경심을 표하기도 한다. 말로는 친구가 거의 없는 복잡하고 때로는 감상적인 인물이며, 자신이 비윤리적이라고 판단하는 의뢰는 거절하는 등 나름의 확고한 도덕적 기준을 가지고 행동한다. 이는 당시 사회의 부조리와 타락에 대한 비판적 시선을 반영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챈들러 자신도 펄프 소설의 상업성과 작가들의 안일한 태도를 비판했으며, 그의 에세이 "간단한 살인법"은 이러한 비판 의식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글로 평가받는다.

한편, 챈들러의 작품에 대한 비판도 존재한다. 워싱턴 포스트의 평론가 패트릭 앤더슨은 그의 줄거리가 "기껏해야 두서없고, 최악의 경우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지적했으며 (챈들러조차도 ''빅 슬립''에서 운전기사를 누가 살해했는지 몰랐다는 일화는 유명하다[29]), 특히 작품 속 흑인, 여성, 동성애자 캐릭터 묘사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며 챈들러를 "때로는 다소 불쾌한 사람"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30][31][61] 그럼에도 앤더슨은 챈들러를 "아마도 주요 범죄 작가 중 가장 서정적인 작가"라고 칭찬하며 그의 문학적 성취를 인정했다.[32]

6. 한국에 미친 영향

한국의 소설가 윤대녕은 제주도에서 신작에 몰두하면서 챈들러의 작품을 비롯한 미국 소설들을 전혀 새로운 시선으로 다시 읽게 되었다고 말한 바 있다.

신예 소설가 정이현도 "셜록 홈즈필립 말로 둘을 한 공간에 나란히 세워놓고 뭇 여성들에게 '남자'로서 하나를 고르라고 한다면, 대부분 망설임 없이 말로 쪽을 택할 것이다. 이유는 단순하다. 여자란 원래 더 매력적인 남자 쪽을 좋아하기 마련이니까"라고 썼다.[68]

7. 작품 목록

(내용 없음)

7. 1. 장편 소설

제목원제출판 연도비고
빅 슬립The Big Sleepeng1939
안녕, 내 사랑Farewell, My Lovelyeng1940
높은 창문The High Windoweng1942
호수의 여인The Lady in the Lakeeng1943
리틀 시스터The Little Sistereng1949
롱 굿바이The Long Goodbyeeng1953
재생Playbackeng1958
푸들 스프링스Poodle Springseng1959미완의 원고를 로버트 B. 파커가 1989년에 완성[40]


7. 2. 단편 소설

대공황으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던 레이먼드 챈들러는 생계를 위해 글쓰기를 결심하고, E.S. 가드너의 페리 메이슨 시리즈와 펄프 픽션 작법을 독학했다. 1933년, 그는 미국의 유명 펄프 픽션 잡지 『블랙 마스크』에 18,000단어 분량의 중편 Blackmailers Don't Shoot|블랙메일러스 돈트 슛영어을 발표하며 작가로 데뷔했다. 이 작품을 쓰는 데 5개월이 걸렸다고 한다.

챈들러는 1950년 영국 출판사 해미시 해밀턴에게 보낸 편지에서 왜 펄프 픽션을 읽고 쓰기 시작했는지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태평양 연안을 자동차로 다니면서 싸구려 쓰레기 잡지(펄프 픽션)를 읽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여성 잡지를 읽는 취미는 전혀 없었거든요(그렇게 말해도 된다면 말입니다). 그 시대는 블랙 마스크지의 황금기였고, 조악한 면도 있지만, 그 글쓰기는 상당히 강력하고 정직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소설 쓰는 법을 배우면서 용돈을 벌 수 있다면 좋은 방법이 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5개월을 들여 18,000단어짜리 중편을 썼고, 그걸 180USD에 팔았습니다. 그 후로 꽤 불안한 시기를 보냈지만, 저는 결코 뒤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습니다."[51]

그의 주요 단편 소설 목록은 다음과 같다.

제목발표 연도비고
Blackmailers Don't Shoot|블랙메일러스 돈트 슛영어1933
Smart-Aleck Kill|스마트-앨릭 킬영어1934
Finger Man|핑거 맨영어1934
Killer in the Rain|킬러 인 더 레인영어1935
Nevada Gas|네바다 가스영어1935
Spanish Blood|스패니시 블러드영어1935
The Curtain|더 커튼영어1936
Guns at Cyrano's|건스 앳 시라노스영어1936
Goldfish|골드피시영어1936
The Man Who Liked Dogs|더 맨 후 라이크드 도그스영어1936
Pickup on Noon Street|픽업 온 눈 스트리트영어1936
Mandarin's Jade|만다린스 제이드영어1937
Try the Girl|트라이 더 걸영어1937
Bay City Blues|베이 시티 블루스영어1938
The King in Yellow|더 킹 인 옐로영어1938로버트 W. 챔버스(Robert W. Chambers)의 동명 소설과는 다름.
Red Wind|레드 윈드영어1938
The Lady in the Lake|더 레이디 인 더 레이크영어1939
Pearls Are a Nuisance|펄스 아 어 누선스영어1939
Trouble is My Business|트러블 이즈 마이 비즈니스영어1939
No Crime in the Mountains|노 크라임 인 더 마운틴스영어1941
The Pencil|더 펜슬영어1959말로 최후의 사건



단편 소설 "베이 시티 블루스"(이나바 아키오 번역)가 게재된 『엘러리 퀸스 미스터리 매거진』 1964년 10월호.


챈들러가 필립 말로를 주인공으로 쓴 마지막 단편은 1957년경 집필된 "The Pencil"로, 한국에서는 "말로 최후의 사건"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다. 이 작품은 HBO에서 1983년부터 1986년까지 방영된 드라마 시리즈 ''Philip Marlowe, Private Detective''의 한 에피소드 원작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7. 3. 영화 각본

챈들러는 할리우드에서 영화 각본가로도 활동했다. 그의 장편 소설 중 『플레이백』을 제외한 모든 작품이 영화화되었으며, 특히 하워드 혹스 감독, 험프리 보가트 주연의 『빅 슬립』(1946)은 윌리엄 포크너가 각본에 참여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챈들러가 쓴 각본과 그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들은 필름 누아르 장르의 스타일과 주제 형성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그는 자신의 단편집 『내 일은 문제다』(1950) 서문에서 탐정 소설과 영화의 관계에 대해 언급하며, 추리 소설을 영화화할 때 중요한 것은 단순한 결말의 반전이 아니라 좋은 장면들의 연속이라고 주장했다. 한 프로듀서가 추리 소설은 영화화하기 어렵다고 말한 것에 대해, 챈들러는 그것이 잘못된 종류의 미스터리에 대한 생각 때문이라고 반박했다.[59]

챈들러가 각본 작업에 참여한 주요 영화는 다음과 같다.

연도제목제작사비고
1944년이중 배상파라마운트빌리 와일더와 공동 각본, 제임스 M. 케인 원작
1944년사랑의 새벽파라마운트프랭크 파르토스와 공동 각본, 레이첼 필드 원작
1945년The Unseen|디 언신영어파라마운트헤이거 와일드와 공동 각본, 에설 리나 화이트 원작
1946년푸른 달리아파라마운트오리지널 각본
1951년낯선 승객워너 브라더스체인치 올몬드와 공동 각본, 패트리샤 하이스미스 원작, 앨프레드 히치콕 감독



또한, 다음과 같은 미제작 각본도 집필했다.

연도제목제작사비고
1946년The Innocent Mrs. Duff파라마운트엘리자베스 샌세이 홀딩 원작
1948년Playback유니버설오리지널 각본, 소설 『플레이백』의 원형



이 외에도 오리지널 각본을 위한 시놉시스 "Backfire: Story for the Screen"이 사후에 출판되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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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웹사이트 Sheffield Hallam Working Papers: The Thirties Now https://extra.shu.ac[...] 2022-05-02
[3] 뉴스 The Simple Art of Murder https://www.theatlan[...] The Atlantic 1944-12
[4] 뉴스 The Big Text https://archive.nyti[...] The New York Times 1995-10-08
[5] 간행물 Raymond Thornton Chandler 201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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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뉴스 The Knight of Sunset Boulevard (paid access only) http://www.nybooks.c[...] 2007-12-06
[45] 서적 レイモンド・チャンドラー語る 早川書房 1984
[46] 웹사이트 Raymond Chandler http://waterfordirel[...] Waterfordireland.tripod.com
[47] 웹사이트 アーカイブされたコピー http://www.dcs.gla.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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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웹사이트 Raymond Chandler's Shamus Town http://raymondchandl[...]
[51] 서적 The Raymond Chandler Omnibus Borzoi Book a division of Alfred A. Knopf, Inc. 1969
[52] 문서 『青い戦慄』の脚本の書籍化で、1988年10月に角川書店から刊行されたマシュー・J ・ブラッコリ(Matthew J. Bruccoli)=編集『ブルー・ダリア(原題:THE BLUE DAHLIA A Screenplay)』に、脚本をめぐるチャンドラーとの遣り取りを回想した、ジョン・ハウスマン(John Houseman)「<回想>失われた二週間」を収録、石田善彦訳。
[53] 문서 晶文社『映画術 ヒッチコック/トリュフォー』フランソワ・トリュフォー著、山田宏一・蓮實重彦共訳 P211よ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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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문서 村上春樹訳は、全7作全てハヤカワ・ミステリ文庫で再刊
[64] 문서 この名は鮎川信夫の筆名と考えられているが、北村太郎はEQ1981年5月号のエッセイ「ミステリとわたくし」で、本作は自分が翻訳したと記している。
[65] 문서 The Knight of Sunset Boulevard, Pico Iyer, 2007년 12월 6일
[66] 서적 Raymond Chandler Speaking Houghton Mifflin Company 1962
[67] 웹사이트 The Man Who Gave Us Marlowe - November 7, 2007 - The New York Sun http://www.nysun.com[...]
[68] 서적 20세기 인물 100과 사전 숨비소리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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